소화 불량이면서 많이 먹는 사람, 이것이 대부분 학자의 머리 속을 정확하게 나타낸 말이다.
예를 들면 펠릭스 아르베르의 임종 모습을 옮겨적는 사람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병원에서였다. 조용하고 침착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간호하던 수녀는 그가 실제 숨을 거두기도 전에 이미 마지막 길을 떠나버린 줄 알았다. 그녀는 무엇 무엇이 어디에 있다면서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지시를 했다. 그다지 교육을 받지 못한 수녀였다; 그 때 부득이 'Korridor(복도)'라는 단어를 써야했는데 글로 쓰여져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Kollidor'라 읽는 줄 알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를 듣고 아르베르는 죽음을 잠시 미루었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해두는 게 먼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또렷하게 정신을 차리고는 'Korridor'라고 정정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죽었다. 그는 시인이어서 애매한 것은 질색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이 일은 진실에 관한 문제였을 것이다. 혹은 이 세상이 이토록 무신경하게 굴러간다는 것을 삶의 마지막 인상으로 가져간다는 게 언짢았는지도 모른다.
연구에 활용되는 기술과 보조적 수단들이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초보자는 쉽게 겁을 먹고 “준비”하기 위하여 연구하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다.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지, 또 실제 연구에서는 어떤 종류의 기술이 필요할지를 미리 알지 못하므로, 이와 같은 “준비” 과정은 끝이 없으며 정신적으로도 해롭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고, 우리가 이미 습득한 기술보다 더 많은 기술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술과 보조적 수단들을 배우게 하는 큰 유인책은 이를 시급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주 많은 과학자들은 (나 자신도 분명히 이 중의 한 사람)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기법을 터득할 필요성이 절실해질 때까지는 배우고 터득하지 않는다 - 필요성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아주 빨리 배워지고 터득된다. 항상 “준비”만 하는 사람, 그리고 학위와 자격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신을 고달프게 하는 “야간 학교 단골 손님”이 되려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절박감이 결여되어 있다.
“아름다운 대답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도대체 언제가 되면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속임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인간의 알맹이가 정해지는 것은 그를 불안케 하는 것에 의해서지, 그를 안심시키는 것에 의해서는 아닌 게야.” (레비나스의 스승 슈샤니의 말이라 전해짐)
과학 및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객관적'이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유래할 리도 없다). 그런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의 우호적-적대적 협동(friendly-hostile cooperation of many scientists)에서 유래한다. (중략) 우리가 '과학적 객관성'이라고 일컫는 것은 과학자의 개인적인 비당파성의 산물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또는 공공적 성격(social or public character of scientific method)의 산물이다. 그리고 과학자의 개인적인 비당파성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사회적 또는 제도적으로 구축된 과학적 객관성의 성과인 것이지, 그 기원은 아니다.
자네로부터 연락 받고 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에 아주 기뻤네. 안타깝게도 자네의 편지를 보니 아주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는군. 자네의 선생(=파인만 자신)이 무엇이 가치있는 문제인지 잘못된 생각을 심어준 것 같네. 가치있는 문제란 자네가 정말로 풀 수 있거나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제이고 자네가 정말로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문제일세. 만일 어떤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 앞에 놓여있고 우리가 거기서 약간이라도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그건 위대한 과학 문제이지. 나라면 얼마나 사소하든 상관없이, 정말 쉽게 풀 수 있는 뭔가를 찾을 때까지 더 간단한 – 자네의 표현대로라면 더 초라한 – 문제를 택하라고 말하겠네. 그러면서 문제가 풀리는 기쁨, 그리고 동료를 돕는다는 기쁨을 찾을 걸세. 설령 그게 자네보다 능력이 부족한 동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야. 무엇이 가치있는지에 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이런 기쁨을 잊어서는 안 되지.
자네는 내 경력의 최고점에서 나를 만났지. 그러니까 내가 신들에게 근접한 문제에 매달려 있는 듯이 보였을 걸세. 하지만 동시에 내겐 다른 박사과정생이 있었고 그의 연구주제는 해수면 위에서 부는 바람이 이떻게 파도를 일으키는지에 관한 것이있지. 그가 풀고 싶어하는 문제를 내게 들고 왔기 때문에 그를 학생으로 받아들였다네. 내가 자네에게 한 실수는, 스스로 문제를 찾아오라고 한 대신 내가 문제를 준 것이고 그럼으로써 재미있고 기쁘거나 중요한 일(즉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음을 알게해주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잘못된 생각을 남긴 거네. 미안하이. 이 편지로 조금이나마 바로잡았으면 좋겠네.
나는 자네가 초라하다고 부를 만한 수많은 문제들을 연구했지만 정말 즐거웠다네. 가끔씩 부분적으로 성공했거든. 예컨대 고도로 정련된 표면에서의 마찰계수에 관한 실험이나 어떻게 마찰이 작용하는지 알아내기 (이건 실패였어). 혹은 결정의 탄성이 원자 사이의 힘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아니면 전기도금된 금속 막대를 (라디오 손잡이 같은) 플라스틱 물체에 달라붙게 하는 방법 따위. 아니면 어떻게 중성자가 우라늄으로부터 확산해나오는지. 아니면 유리를 덮은 필름으로부터 전자기파의 반사, 폭발에서 충격파의 형성, 중성자 계수기 디자인, 왜 어떤 원소는 K가 아닌 L-궤도로부터 전자를 포획하는지. 플렉사곤이라는 일종의 아이 장난감을 만드는 종이접기의 일반이론. 가벼운 핵의 에너지 준위. 난류의 이론 (이 일에 헛되이 수 년을 보냈지). 거기다 양자론의 온갖 더 “위대한” 문제들.
자네가 뭔가 해낼 부분이 있다면 어떤 문제도 너무 작거나 하찮은 게 아니야.
자네는 이름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지. 자네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아. 옆의 동료들이 찾아왔을 때 간단한 질문에 답해줄 수 있다면 오래지 않아 그런 시간은 끝날 걸세. 자네는 내게 이름없는 사람이 아니야. 스스로에게 무명으로 남아있지 말게. 너무 우울한 길이잖나. 세상 안에서 자네의 자리를 알고 스스로 공정하게 평가해보게. 젊은 시절의 치기어린 이상이나, 자네 선생의 이상이라고 잘못 상상한 것들로써가 아니라.
건승을 바라며. 리처드 P. 파인만 http://www.lettersofnote.com/2015/10/do-not-remain-nameless-to-yourself.html
피셔(F. Th. Vischer)의 말을 빌린다면, '소재수집가(Stoffhuber)'와 '의미탐색자(Sinnhuber)'가 있다. 전자는 오직 기록자료와 통계표 그리고 설문조사표들로 허기를 채울 뿐 새로운 아이디어의 세련에는 무감각하다. 후자의 미식취향은 늘 새로운 지적 섬세함에 빠져 사실에 대한 미각을 상실해버린다. 진정한 예술가적 재능은 - 역사가들 중에서는 랑케(Ranke)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는데 - 이미 알려진 사실을 알려진 관점에 따라 해석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어느 랍비가 잠이 들어 낙원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거기에서 놀랍게도, 그는 현자들이 탈무드의 난해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낙원의 보상인가?” 랍비는 외쳤다. “왜 그들은 지상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는가!” 이때 그는 자신을 꾸짖는 목소리를 들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너는 현자들이 낙원에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정반대로다! 낙원이 현자들 안에 있도다.” - Nathan Ausubel, A Treasury of Jewish Folklore, Crown Publishers, NY (1960), p.55
밤중에 한 취객이 가로등 아래서 뭔가 찾고 있는 것을 경찰관이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취객이 열쇠를 잃어버렸노라고 해서 둘은 가로등 아래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몇 번을 해봐도 열쇠를 찾지 못하자, 경찰관은 여기서 잃어버린 게 맞느냐고 물었고 취객은 “아닙니다, 저기 공원에서 잃어버렸지요.”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어진 경찰관이 그럼 왜 여길 뒤지고 있느냐고 하자 취객이 대꾸했다. “여기에 불빛이 있으니까요.”